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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 뿌리에서 올라오는 꽃 향기를 품은 '맹렬한' 나의 첫 사랑, 아베크롬비 '피어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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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 뿌리에서 올라오는 꽃 향기를 품은 '맹렬한' 나의 첫 사랑, 아베크롬비 '피어스'

Grene 2025. 7. 14. 01:02

 때는 2011년도 즈음,

어학연수 겸 미국에 한달 동안 지낸 적 있다.

 당시 사촌 누나가 샌프란시스코 근처에 있는

버몬트라는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고,

나는 그 사촌 누나를 만나러 갔다.

 

 당시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있던 브랜드가 있다.

바로 아베크롬비와 홀리스터.

 

"너 아베크롬비 알지? 몰라?"

사촌 누나가 물었다.

 유행에 그다지 관심이 없던 나는

이름도 너무 생소했다.

아베? 뭐? 좀비?

뭔 이런 이름이 다 있지 싶었다.

낯설고 심지어 이상하게 느껴졌다.

아베크롬비...

 

 아베크롬비가 이름을 날리게 된 이유에는

헐벗고 나온 남녀 모델들의 섹스어필과

매장에 들어가자마자 진동하는

피어스를 활용한 후각마케팅을 빼 놓을 수 없다.

 

Abercrombie & Fitch

 

 사촌 누나가 사준 향수 냄새가 짙게 배인,

소매가 원숭이처럼 긴 남방과 질질 끌리는 바지는

기럭지가 맞지 않아 자주 입지도 못 했다.

 하지만, 그 독특한 이름과 옷에 밴 향기만큼은

내 기억에 강렬하게 박혔다.

 

 한국으로 모셔온 남방과 바지는

커서 입지도 않으면서 향이 날아가지 않게

고이 모셔두기만 하다 맹렬한 향의 발톱이

무뎌졌을 때 쯤 놓아줬다.

 

 이따금씩 아베크롬비 피어스

그와 비슷한 향을 맡으면,

미국에 있었던 그 때의 기억이 함께

눈에 그려지며 추억에 잠기곤 했다.

 

 그 추억을 오래 기억하고자

아베크롬비 피어스를 구하려고 해봤다.

 하지만, 아베크롬비 피어스는 우리나라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향수는 아니다.

과거에도, 지금도 말이다.

 아시아에서 매장을 늘리는 시기에

한국 시장에 잠시 들어오긴 했었지만

몇 년 안 지나 완전히 철수했다.

 

 아베크롬비 CEO의 외모지상주의적이고

백인우월주의적인 발언으로 인해 이미지가

하락하다 못해 이젠 아베크롬비는

'옛날' 브랜드가 되어버렸다.

 

 구하기 힘들어 미국에선 5~6만원이면

사는 향수를 10만원은 주고 사야한다.

이 가격이면 조말론이나 다른 유명 브랜드 향수

혹은 비슷한 향이 나는 다른 향수를 살 수도 있는데

이미지가 떡락한 브랜드의 향수를 굳이

살 이유가 있나 싶었다.

 

 

 그럼에도 조마드 향수를 시작으로

내가 좋아하는 향을 다시 수집하고자 하는 마음과

좋았던 기억의 조각을 되찾고 싶은 마음에

아베크롬비 피어스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해외구매대행 업체를 잘 찾은 탓에

생각보다 싼 가격에 구입했다.

 

 

 기억은 왜곡될 수도 있다고 하던데,

맨 처음에는 내가 기억하는 향이

이런 향이었나 싶었다.

 

 길거리나 지하철에서 스쳐지나갈 때 맡았던

'어 이거 아베크롬비 피어스 같은데?'

할 때의 향과는 많이 달랐다.

 

 

 아베크롬비의 첫 인상(탑노트)은

젠틀한 40대 아저씨의 향이다.

 목욕탕에 비치되어 있는 스킨 향이라기보단,

간혹 아저씨들이 목욕탕에 따로 챙겨오는

로션에서 나는 아저씨 향이랄까.

 

 다시 말해 아저씨 향은 아저씨 향인데,

섬세한 성격을 지녀 정갈한 모습을 유지할 것 같은

그런 아저씨 향 말이다.

 주는대로 막 쓰는 수더분함이 아닌

자기만의 취향도 있는 젊은

형저씨의 이 느껴진다.

 

 하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깔끔한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남자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체크무늬나 개성있는 정장을 즐겨입을 것 같은,

퇴근 후엔 땀을 흘리길 좋아할 것 같은

깔끔한 남자가 떠오른다.

 

 정리를 해보자면 아베크롬비의 향은

아저씨에서 남자로 거슬러 올라가는 과정이

인상적인 향수라고 말하고 싶다.

 

 

탑 노트 : 전나무, 레몬, 오렌지, 카다몬, 페티그레인
미들 노트 : 로즈마리, 은방울꽃, 자스민, 로즈, 세이지
베이스 노트 머스크, 베티버, 오크모스, 브라질리언 로즈우드, 샌달우드

 

 

 

 우선 나는 내가 느껴지는 느낌에 집중을 먼저하고,

생각이 정리된 이후에야

탑노트, 미들노트, 베이스 노트를 찾아본다.

이게 도대체 무슨 향을 섞어 만든건가 싶어서.

 

 각각의 향과 특징을 잘 모르겠지만,

며칠 써보면서 머리 속에서 정리된 느낌을 말하자면

'아저씨에서 남자로 거슬러 올라가는 그 과정'

'쓴 뿌리향이 꽃잎으로 향해 올라가는 느낌'과 같았다.

 

 아베크롬비 피어스는 마치

"난 쓰디 쓴 인생의 맛도 알지만,

달콤한 향도 음미할 줄 아는 남자야!"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인생의 쓴맛은 알고 있지만,

달콤한 인생을 즐길 줄 아는 남자라 그런지

가볍지 않은 진중함이 느껴진다.

그렇다고 중후하지도 않다.

 

 겉으로 봤을 때는 젊잖고 친절하지만,

막대하기 어려울 것 같은 그런 남자다.

 

 적어도 열에 여덟 아홉 정도의 여자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남자 냄새'의 전형이라

호불호는 거의 없을 향이다.

 개인적으로 느꼈을 땐 꽃 향기가 지배적이진 않다.

하지만 이따금씩 느껴지는,

아주 은근하고 은은한 꽃 향기는

쿰쿰한 남자 냄새에 얹혀져

섹시한 '남자의 향기'를 자아낸다.

 

Abercrombie & Fitch Fierce

 

 향은 나를 다른 세계로 옮겨놓는 힘이 있다.

코 끝의 기억이 심어진 장소로 데려다놓는 힘.

 나에게 있어서 아베크롬비 피어스는

첫사랑과 같은 향수다.

 20대 초반에 멋모르고 갔었던 미국에 심어진

사랑의 조각들이 나를 살게 한 원동력이 됐다.

피어스는 내게 그 힘을 주는 아련한 첫사랑과 같다.

 

 내가 써본 향수가 대단히 많은 것도 아니라

아직까진 내게 인생 향수로 남아있다.

 

 아베크롬비의 CEO가 망언을 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도 가끔한다.

 내가 한 때 아베크롬비를 멀리했던 이유가

내 나름 한국인으로서, 아시아인들을 무시하는

CEO의 제품을 사서 써야하나?하는 자존심에

첫사랑을 가슴에 묻고 지냈었다.

 

 아프지 않은 첫사랑은 없다.

아프지 않다면 그건 첫사랑이 아닐테니까.

아프지만, 자존심 상하지만,

아픈대로, 자존심 상하는대로 두는 것도

그 나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맹렬했던 사나웠던 첫사랑의 기억을 가슴에 묻기보단

심장과 맥박 위에 두고 사는 것도

나름 괜찮다고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